재난과 파국의 시대에서 일상의 사물을 그리다
성원선 (미술비평)




가늠해 본 무게
2021
Oil on canvas
37.9 x 37.9 cm


언어와 이미지의 간격에서 강정인 작가는 묘사를 통해 사물성에 대한 접근을 이야기 한다. ‘이미지의 배반(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La trahison des images(ceci n’est pas une pipe)‘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르네 마그리뜨(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의 작품으로 그는 1929년 캔버스에 담배파이프 하나를 유화로 그려놓고, 그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라고 그려두었다. 이미 알려진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을 전복시킬 아무것도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그대로를 그려두고, 보이는 대로 믿지도, 상상도 말라고도 하는 마그리뜨의 명령 아닌 명령은 관람객의 당혹감을 증폭시키는 모순된 회화적 어법이라는 미술사가들의 해석에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실제와 가상의 세계는 현재 세계에서 점점 더 구분 짓기 힘들어지고 있다. 이런 무경계의 이미지 놀이들이 이미 방송, 엔터테이먼트, 영화, 드라마, 웹툰을 비롯해 게임까지 무한정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강정인의 작업을 보는 순간 그녀가 가진 사실적 표현기법에 철학적 한계성을 어떻게 작품의 총체적인 구성들이 벗어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자 했었다.

현재의 현상을 보자면, 코로나 19라는 몹쓸 병이 전 지구를 휘몰아친 2020~2021년은 아마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아주 많은 변화를 주는 시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작은 충격이었고 팬데믹으로 확산되는 과정과 죽음의 바이러스를 넘어 인류의 생존을 새롭게 준비해야 하는 이 재난의 시대에서,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마주하고 보고 생각해야하는지를 새삼 깨달아간다. 눈빛조차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손을 온통 소독제로 문지른다. 거리를 지나면서 모바일 폰에 계속 울리는 재난경보의 알림은 우리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지역의 경계를 넘을 때 마다 “000구 00명 확진자 발생, 감염 경로 접촉자는 질병관리센터로 신고바람” 등등의 지시어로 우리를 꼼짝달싹 못하게 한다. 늘 모바일 폰과 태블릿 PC는 열려있지만, 바깥세상으로 향하는 창은 닫혀있다. 소소하고, 무료한 일상을 더욱더 소소하게 만드는 건 소일거리로 잡아든 몇몇 개의 천 조각을 이어붙인 애완묘의 옷 만들기나 성냥개비로 이어 붙여 만들 수 있는 종이집 만들기로 장식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창문을 열어두니, 바람이 들어와서 좋겠지만, 바람결에 바이러스가 날아올까 봐 그것도 잠시이고, 흐트러진 벽장의 물건들은 곧 다시 의미 없는 제자리 찾기로 잠시 열어둔 창문에 들여온 새소리도 잊게 한다.

강정인 작가는 다시 집으로 왔다. 서울로 그리고 프랑스 낭트로 이주했던 지난 시간들은 다시 2021년 고향 집으로 향했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떠난 길 만큼 먼 길이었을까? 학업을 위해, 예술을 위해 떠났던 길을 다시 돌아오면서, 그녀는 검은 사각형의 액자에 걸린 참새 한 마리를 그려 넣었다.

붉은 실로 칭칭 매어진 참새 한 마리는 정밀하고도 세밀한 유화기법을 보여준다. 이렇쿵 저렇쿵 흉내 내는 그림도 아닌, 사물 그대로를 그려내는 상형물류(象形物類)나 물류상응(物類相應)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물의 형상대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다. 상형은 주어진 대상의 형상을 본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강정인이 프랑스에서 유학하지 않았더라도, 우리에게 알려진 정밀한 소묘능력을 가져야만 가능한 회화적 기법으로, 초현실주의 (Surrealism)적인 표현방식은 그녀의 회화적 특성이다. 거의 대다수 그녀의 작업은 상형의 규범을 따른다. 그러나 상형은 따랐으나, 그 사물이 규범을 그려내어야 하는 응물상형(應物象形)과는 다르다.

‘새’의 규범은 나는 것에 있다, 죽어있는 채로 실에 걸려 박제가 될 것 같은 그림이 아닌, 파란 하늘에 아니면 나뭇가지에 앉아서 노래 부르는 살아있는 새!

그녀가 새라는 것의 본질적 규범을 그리고 싶었다면, 바로 나는 새를, 노래하는 새를 그리는 것에 그 표현의 힘을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 있는 새를, 그리고 붉은 운명의 실에 칭칭 감겨 매달려 박제된 새를 아주 자세히, 치밀하게 그려 넣었다. 게다가, 검은 액자에 갇혀 있다. 그 검은 캔버스의 외곽은 실제 나무 액자를 입체적으로 붙이고 그려 넣기까지 했다.

나는 그녀에게 따로 질문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를 이해시킬 이미지의 기호학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죽은 새, 붉은 실 이미지들은 죽음의 코드보다는 검은 액자 아니, 검은 액자에 달린 나무프레임에 더 중요한 가치를 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와의 인터뷰 내내 공을 들여서 나에게 이야기 한 나무프레임은 어떤 규범을 가진 회화적 어법이었을까? 왜 그녀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저 그림처럼 평범하게 내게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두껍고 잘게 나누어진 벽장과 같은 프레임 속으로 다시 숨는다. 그녀의 사물들도 그러했다. 내가 그녀에게 회화적 평면형식으로 보이는 그리드(Grid) 에 관해 물었을 때도 그녀는 그리드보다, 그 그리드의 의미 없는 제자리 찾기 같은 화면 구성을 붉은 실의 사실적 표현으로 살짝 비틀어 내고자 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녀의 실험은 그러했다. 아주 소극적이고, 관객과 심심하지 않게 숨바꼭질을 한다. 이야기의 실마리는 사물에 있지 않고, 그려진 이미지에 있지 않다. 시선을 자르고, 상징을 무시하는 시각적 현상을 그리고자 한 그녀의 소소한 반항들로 붉은실과 그림자들이 나에게는 가장 적극적인 회화적 자세로 보였다. 텅 빈 구석 공간에 남은 검은 그림자 자국은 아마도 사실과 이미지의 규범을 벗어난 가장 적극적인 내면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힘은 바로 이것처럼, 숨겨진 것을 굳이 들추려 하지 않는, (보는 것으로) 이미지를 그대로 그려냄으로 재난과 파국으로 치닫는 일상을 담담하게 기록할 수 있다는 자기 암시와 같은 회화적 태도이다.



재현된 어떤 것들의 재연
박지형 (독립 큐레이터)






<Interlude> 전경
2020
전시공간


마주 보고 있는 두 거울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 사이에는 이름 붙이기 애매한 모양을 한 물체들이 늘어져 있다. 이제 그들은 양쪽 거울에 자신을 닮은 환영을 제공할 것이고, 거울 속 이미지와 공간은 도미노처럼 서로를 반사시키며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필자가 강정인의 작업을 보며 떠올린 풍경이다. 작가는 회화의 독립된 지지체인 평면 안에서만 성립 가능한 룰을 정립시키기보다, 3차원에서 작동하는 물리적 현상이 이미지가 되어 캔버스에 안착하고 그것이 또다시 현실의 물리적 감각으로 반사되어 전이되는 상호작용의 방식에 관심을 둔다. 또한 회화의 단단한 지형지물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조형적 실험이 오늘날 어떤 경험을 생산할 수 있는지에 집중한다. 특히 그의 첫 개인전 <Interlude>는 회화를 포함한 조형 예술의 창작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물리적 재료들의 변형과 서로 간의 교차, 마찰, 접합, 탈각 등의 현상이 평면 위에서 일종의 사건으로 재연(re-enact) 되었을 때의 상황을 다룬다.

작가는 머릿속으로 물성을 가진 재료에 가상의 제스처를 대입해본다. 이는 주로 힘의 작용을 기반으로 한 시시한 사건들의 집합체인데, 종종 하나 이상의 구심점에서 작용하는 중력이나 광원을 발판 삼는다. 납작한 벽을 뜯어내어 그 속살을 들여다보고, 유연한 반죽을 늘어뜨리거나 뭉쳐보고, 같은 유닛의 물체를 쌓아올리는 장면들이 그려진다. 화면은 실재적 공간에 존재한 적 없던 형태와 사물의 조합이 재현되는 작은 무대가 되어주는 것이다. 만져진 모양들은 아직 무엇이 되기 이전의 원재료, 혹은 무엇인가 만들고 남은 찌꺼기들처럼 프레임에 형(形)을 갖고 잠시 머물러 있다. 별다른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각각의 요소들은 묘하게도 한 프레임에서 다른 프레임으로 꼬리잡기를 하듯 이어지며,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작업실 풍경 1>(2020)에서 탁자 위에 어질러진 사물들 가운데 늘어진 반죽 같은 것이 그려진 그림(혹은 사진)은 또 다른 작업 <구상>(2019) 연작의 습작 혹은 부산물로 보인다. 바로 옆 <작업실 풍경 2>(2020) 속 동그랗고 납작한 형태들은 이리저리 나뒹굴다 관객이 발 딛고 서있는 전시장 모퉁이에 무심코 놓인다.

말하자면 ‘interlude’는 무엇이 되기 이전의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막간(interval)의 사건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한 화면이 연쇄적으로 다른 화면들과 맞물리며 서로의 사이-공간(inter-space)이 되어주는 작품들의 속성을 암시한다. 그려진 대상은 작가가 어떤 자의적 연상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태를 만들게 되었을지 유추하게 하는 장치가 되어 고정된 이미지에 연극적 시퀀스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관객이 일원화된 재현의 서사 속으로만 몰입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도리어 눈으로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 그 대상의 물성을 만져내는 몸의 감각을 상상하게 하며, 동시에 관람자가 사각의 프레임 외연에 존재하는 3차원의 공백을 비가시적인 상상의 풍경으로 채워나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 특히 그의 회화가 암시하는 공백은 짐작할 수 없이 넓은 불특정의 영역이기보다 나열된 작업들 사이의 틈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꽤나 구체적이다. 덕분에 우리는 환영으로 가득 찬 평면과 내가 서있는 전시장의 공백에 존재하는 별개의 시공을 지속적으로 접속시키고 스스로 여백을 채워가며 작품을 관람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거울을 떠올린다. 이번에는 거울 사이에 사물과 작가가 함께 서있다. 그는 거울 너머로 이어지는 평면-공간을 물리적 현실에서 운용해갈 수 있는 전략을 생각한다. 이것은 전통 회화의 계보를 거쳐 오늘날 페인터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화면 속 즉물적 요소들이 서로 맺는 연극적 관계들이 전시장 전체의 서사를 다각화하는 과정에서 시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경험들을 생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단,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평면 속의 세계는 언제나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물리적 조건 속에서 시작되어 회화라는 영역의 가장자리로 연결되고, 그것은 다시금 현실의 일부가 된다는 자명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작가의 위치는 두 장(scene)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는 경계에 있다.